영화 똥파리, 폭력은 어떻게 다음 세대로 건너가는가
가장 미워하던 얼굴을 닮아 가는 일
양익준 감독이 연출과 주연을 겸한 <똥파리>(2009)의 주인공 상훈은 용역 깡패로 살아간다. 그는 아버지의 폭력 아래에서 자랐고, 그 아버지를 누구보다 격렬하게 미워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아버지가 하던 일을 그대로 반복한다. 이 모순이 이 영화의 출발점이자 끝이다.
폭력을 다룬 영화는 흔하지만, 이 작품이 다른 지점은 폭력을 사건이 아니라 언어로 그린다는 데 있다. 상훈이 쓰는 유일한 어휘는 욕설이며, 그가 아는 유일한 접촉 방식은 주먹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던져야 할 질문은 왜 저 사람이 폭력적인가가 아니다. 왜 저 사람에게는 폭력 말고 다른 언어가 남아 있지 않은가이다.
학습된 것은 폭력만이 아니다
두려워하던 대상을 자기 안에 들이는 일
정신분석에서는 견딜 수 없는 폭력 앞에 놓인 아이가 가해자의 태도와 논리를 자기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살아남는다고 설명한다. 공격자와의 동일시라 불리는 이 기제는 비겁함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다. 맞는 쪽에 서 있는 한 세계는 통제 불가능하지만, 때리는 쪽의 문법을 익히면 최소한 예측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상훈은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아버지의 방식을 정확히 물려받았다. 심리학자 앨버트 반두라가 밝힌 대로 인간은 보상과 처벌만이 아니라 관찰과 모방으로도 행동을 익히며, 아이에게 가장 오래 노출되는 모델은 대개 가정 안에 있다. 상훈이 아버지처럼 되지 않으려 애쓸수록 아버지처럼 되어 가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가 배운 유일한 관계의 형식이 그것뿐이었다.
폭력은 결국 자기를 향한다
아버지를 향한 태도가 증오 하나로 정리되지 않는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죽이겠다고 소리치던 사람이 정작 아버지가 위태로워지자 그를 업고 병원으로 달린다. 학대의 기억을 가진 사람이 가해자와 완전히 절연하지 못하는 것은 미련이 남아서가 아니다.
그 관계가 자기 존재의 절반을 설명하는 유일한 근거이기 때문이며, 그것을 끊어 내는 일은 자기 일부를 도려내는 일과 잘 구분되지 않는다. 이 영화가 폭력의 대물림을 다룬 다른 작품들과 갈라지는 대목은 상훈의 자기 파괴 성향이다. 그는 위험한 자리를 피하지 않고, 스스로를 지킬 기회를 여러 차례 포기한다. 밖으로 향하던 공격성이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을 겨누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학대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자주 겪는 것은 분노가 아니라 수치심이다. 나쁜 일이 벌어진 이유를 아이는 자기 탓으로 정리하며, 그 결론은 성인이 된 뒤에도 좀처럼 수정되지 않는다. 제목이 스스로를 오물에 꼬이는 벌레에 비유하는 멸칭이라는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남이 붙인 이름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을 부르는 이름이라는 사실이 이 인물의 내면을 요약한다. 자기를 혐오하는 사람은 자기를 보호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폭력이 사적 영역에 봉인될 때
아무도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상훈의 집에서 벌어진 일에 개입한 사람은 없었고, 연희의 집에서 벌어지는 일에도 개입하는 사람은 없다. 두 집 모두 문을 닫으면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다. 가정이라는 공간이 사적 영역으로 분류되는 한 그 안의 폭력은 사건이 아니라 사정으로 취급되며, 사정에는 아무도 개입하지 않는다. 평화 연구자 요한 갈퉁은 눈에 보이는 직접적 폭력의 배후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적 폭력이 있다고 지적했다.
상훈이 몸담은 직업 역시 이 구조의 말단에 놓여 있다. 그는 누군가의 채권을 회수하고 노점을 철거하는 일로 임금을 받는다. 개인의 잔인함으로 보이는 행위가 실은 위임된 폭력이며, 지시하는 쪽은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다는 사실이 화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같은 언어를 쓰는 두 사람
상훈과 연희가 가까워지는 과정은 낭만적이지 않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서로에게 욕을 하고, 그 욕설을 통해 상대가 자신과 같은 환경에서 자랐음을 알아본다. 위로의 말을 배운 적 없는 사람들에게는 거친 말이 유일한 신호 체계다.
이 관계가 구원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서로를 이해하는 것과 서로를 구해 내는 것은 다른 일이며,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만났을 때 흔히 벌어지는 일은 치유가 아니라 상처의 확인이다. 영화는 사랑이 폭력의 회로를 끊어 준다는 흔한 위안을 끝내 제공하지 않는다.
회로는 저절로 끊기지 않는다
결말에서 벌어지는 일은 도덕적 심판이 아니다. 상훈이 자신의 폭력을 후회하기 시작할 무렵, 그가 가르친 방식은 이미 더 어린 사람에게 옮겨 가 있다. 한 사람이 변하기로 마음먹는 속도보다 구조가 자신을 복제하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는 사실을 이 결말은 냉정하게 보여 준다. <똥파리>가 불편한 이유는 폭력의 수위 때문이 아니라 출구를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구가 없다는 진단은 체념이 아니다. 개인의 각성만으로는 이 회로가 끊기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 폭력이 사적인 문제로 남아 있는 한 대물림은 계속된다는 것이 이 영화가 내놓은 결론이다. 문을 두드리는 일은 언제나 안이 아니라 밖에 있는 사람의 몫이다.
